Abstract
사비기에 제작된 백제의 목간은 대부분 부여 지역의 15곳과 나주 복암리에서 출토되었다. 부여목간은 6~7세기 도성 관리들의 글씨를, 나주목간은 7세기 지방 관리들의 글씨를 보여 주므로 두 지역의 목간 글씨를 비교해 보면 백제 京鄕 서예의 특징과 연관성을 알 수 있다.<BR> 80여 점의 부여목간에는 해서, 행서, 초서가 각각 또는 혼용되어져 있다. 북위 해서의 웅강함, 남조 행초서의 유려함 등 서풍도 다양하여 도성의 서사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능산리사지 출토<‘支藥兒食米記’목간>의 노련한 행서는 거침이 없어 자연스럽고, 부드러우면서 힘차 백제의 미감이 가득하다. 궁남지의 문서목간은 변화무쌍하면서 능숙하고, 관북리 목간의 웅강무밀한 해서는 백제의 남북조 취향을 드러낸다. 감사 인사를 담은 동남리의 꼬리표목간은 드물게 유창한 초서로 쓰였다. 618년의 환곡 기록을 적은 쌍북리 출토 <‘佐官貸食記’목간>은 용도에 맞게 정연한 해서로 쓰였지만 동시에 획의 강약과 길게 늘어진 파책에서 변화를 주었다. 구아리 출토 해서 목간의 단아하면서 절제된 서풍과 행서 목간의 유려하면서 자유분방한 서풍은 대조를 이루지만 각기 다른 분위기로 특출하다.<BR> 13점의 나주 복암리 목간의 해서에는 행서 필의가, 행서에는 해서와 초서 필의가 있다. 문서목간의 행서도 자간이 일정하고 질서정연하다. 특히 목간 1호와 12호의 글씨는 부여목간만큼 유려하지도, 변화무쌍하지도 않지만 그 전아미, 절제미, 노련미에는 부여목간이 범접할 수 없는 오묘한 맛이 있다.<BR> 두 지역의 목간 글씨는 다를 뿐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이는 나주목간 글씨가 부여목간 글씨에 견줄 수 있을지언정 결코 뒤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나주목간 글씨의 출중함은 중앙의 영향도 있겠지만 중국과의 직접 교류를 통한 영향일 수도 있다. 따라서 나주목간 글씨의 특출함은 부여목간의 글씨와는 별개로 나주 관리의 독창성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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