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황주 성불사는 황해북도 황주군 正方山城 내에 위치한 사찰로 898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성불사를 촬영한 여러 유물 가운데<성불사당주무량수주성원문(成佛社堂主無量壽鑄成願文)>을 분석한 연구이다. 원문은 1327년 성불사의 무량수여래삼존상을 조성한 배경과 목적, 시주자들을 기록한 절첩본 형식의 발원문이다. 41명의 시주자 중 약 30명이 관료층이라는 점에서 관료 중심의 불사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正宮位下’와 ‘火者’라는 명칭을 사용한 박환○은 元에서 활동한 고려인 출신 원 환관으로 원 황후에 소속된 관리임을 알 수 있다. 또 함께 참여한 윤석(尹 碩)은 충숙왕의 최측근 세력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밖에도 황주(黃州)와 평안도 지역 관료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는데 평안도와 인접한 황주의 지리적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성불사당주무량수주성원문>은 고려인 출신 원환관과 충숙왕의 측근 관료, 평안도 일대의 관료층이 중심이 된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1327년은 성불사에서는 무량수여래삼존상과 함께 응진전(應眞殿)을 건립하고 있어 당시 사찰 전체에 대한 대규모 불사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환관 이삼대(李 三大)가 함께 발원한다는 묵서가 있어 환관들이 중요한 시주자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4세기에 고려인 출신 원 환관들이 자신의 재력과 권력을 바탕으로 고려와 원에서 여러 불사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점에서 성불사도 그러한 경향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한편, 성불사 <무량수주성원문>을 납입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이 유리건판 사진으로 남아있다. 대의를 입은 방식과 세부 표현에서 국립중앙박물관소장 금동여래좌상(1333)과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1346)과 비슷하다. 특히, 북한지역에도 이와 유사한 8구의 여래상이 전하고 있어 주목된다. 비록 유리건판 사진에 기초한 비교, 분석이라는 한계와 14세기 전반 불상과의 일부 양식적 차이가 감지되지만 성불사 상은 대체로 14세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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