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權尙夏는 조선 후기 西人-老論계의 宗匠인 宋時烈과 정치적·학문적 궤를 같이했던 嫡傳제자이다. 권상하는 조선 후기사에서 정치·학문·사상 등 다양한 방면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그러나 사상과 학문에 비해 권상하의 정치적인 부분을 다룬 논문은 전무하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던 권상하의 경우에 당시 사회에서 권상하의 정치적 위상과 활동을 상징하는 것은 바로 서인-노론계의 종장인 스승 송시열을 제향한 서원 건립 등을 통한 추숭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전국의 송시열 제향서원을 검토한 후 서원 건립 및 운영 과정에서 권상하의 역할을 검토하여 권상하의 정치적 활동의 일면을 확인하였다.<BR> 먼저 Ⅰ장에서 전국의 송시열 제향서원 현황을 검토하였다. 이 과정을 통하여 48개로 알려져 있던 송시열 제향서원을 4개 더 찾아내어 52개의 서원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단일 인물 제향서원으로 송시열 제향서원의 갯수는 압도적인 1위였다. 그리고 송시열 제향서원의 건립이나 추배 시기가 권상하 생전에 집중(63%)되어 있는 것과 송시열 제향서원의 분포가 권상하가 주로 머물렀던 충청도에 집중(40%)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시기와 지역이 집중된 부분이 바로 송시열 제향서원의 건립 및 추배에 제자 권상하가 적극적으로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BR> 권상하가 송시열 제향서원의 건립과 추배에 개입한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52개 서원을 모두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송시열 제향 서원에 자료가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Ⅱ장에서는 권상하의 문집인 『한수재집』 기록을 기초로 하여 권상하가 송시열 서원 건립과 추배 그리고 운영에 개입한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그 결과 추배에 적극 참여한 기사가 가장 많았다. 이처럼 권상하가 적극적으로 송시열의 추배를 추진한 것은 좀 더 손쉽게 창건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고, 첩설금령을 피하는 방법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다음은 서원 건립에 관여한 기사가 많았는데, 특히 권상하는 남인계의 성향이 강하거나 특별한 당색이 없는 지역에 송시열 제향서원을 건립함으로써 새롭게 노론 세력을 扶植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BR> 건립 이후에도 권상하는 이건 및 중건 役事를 주도하기도 하고, 서원 位次를 바꾸기도 하였다. 또한, 서원 院規나 祭享禮 같은 서원 운영에 중요한 규례를 직접 정해 주면서 송시열 제향서원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BR> 이같은 송시열 제향서원 건립과 운영과정 속에서 서인-노론계의 적전인 권상하가 의도한 정치·사회적 의미는 분명했다. 먼저, 송시열은 朱子와 合享되는 경우가 가장 많았는데, 이것은 권상하가 송시열 제향서원 건립이나 추배를 통하여 주자-송시열로 이어지는 道統 정립을 시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 송시열을 제향한 서원이 창건되거나, 기존 서원에 추배되었을 경우 그 지역의 노론 세력이 강해졌다. 이것은 교육과 향촌 교화 기능을 지니고 있던 서원이 노론 세력의 지역 부식 도구 중 하나로 변질된 모습을 보여주며, 송시열 제향서원 건립이나 추배는 송시열의 伸冤이라는 의미에 더하여 노론계의 지역 거점 확보에 하나의 방법이 되었던 것을 뜻한다.<BR> 송시열 적전제자인 권상하의 적극적인 역할로 인하여 송시열 제향서원은 비약적으로 많아졌고, 당쟁에 있어서 노론의 정치적 입장과 명분을 합리화해 주는 상징물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권상하가 활약했던 숙종대 이후에는 각 당파마다 서원 남설화가 잇따르며, 서원은 교육적 기능보다 당파적 성격이 가중화 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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