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윤인보의 생몰년과 가계 등은 자료상의 한계 때문에 자세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고려말 조선초기에 역관가문에서 태어나 세조 초까지 왜통사로 활동하였으며, 활동 근거지는 경상도 김해 인근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동생 윤인시도 왜통사였다.<BR> 윤인보는 세종대에 5회에 걸쳐 대일 사행의 통사 또는 부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윤인보의 대일 교섭 활동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사역원에서 자제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도록 건의하여 왜통사를 양성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둘째, 조선의 국왕과 일본 사신들 사이에서 통역을 담당하고, 사행을 통하여 조선과 일본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셋째, 그는 중국과 일본의 造船 기술 도입을 주장하였으며, 칡뿌리와 고사리를 구황식품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건의하는 등 일본의 문물도입에도 적극적이었다. 넷째, 그는 왜구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건의하고, 양국 간의 외교 현안 및 왜인 범죄자에 대한 처리문제에 대한 자문 역할을 담당하였다. 다섯째, 그는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의 구입을 담당하고, 물건 값의 조정에도 관여하였다. 여섯째, 그는 일본 사행 중에 사신의 접대와 숙박 장소, 국왕과 주변 세력과의 관계, 九州와 대마도의 호족에 대한 정보를 정탐하여 보고하였다.<BR> 이처럼 윤인보는 조선초기 특히 세종대에 조선과 일본 간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지속하는데 기여한 전문 외교관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윤인보가 대일외교에서 많은 활약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사행을 통해서 얻은 일본에 대한 지식과 일본 지방 세력과의 인적 네트워크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수차례 삭탈관직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듭해서 사면과 복권을 해줌으로써 그가 외교관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세종의 용인술도 그 배경이 되었다.

Full Text
Paper version not known

Talk to us

Join us for a 30 min session where you can share your feedback and ask us any queries you have

Schedule a call

Disclaimer: All third-party content on this website/platform is and will remain the property of their respective owners and is provided on "as is" basis without any warranties, express or implied. Use of third-party content does not indicate any affiliation, sponsorship with or endorsement by them. Any references to third-party content is to identify the corresponding services and shall be considered fair use under The CopyrightLa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