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이 글은 충남 홍성에서 나온 유교 잡지 『인도』를 대상으로 그것의 실증적인 됨됨이를 바르게 밝히고, 그 안에 담긴 문예면의 특성을 구명하는 목표로 이루어졌다. 첫째, 『인도』는 알려진 바와 달리 1929년 6월 창간호부터 1931년 3월 제2권 제2호까지 8권이 나왔다. 월간을 겨냥했으나 검열로 말미암아 합호와 결호를 거듭했다. 호당 3000부에서 5000부까지 낸 것으로 보이는 인도의 유통 범위는 홍성을 중심으로 충남북 일대와 영호남에 걸쳤고 멀리 만주까지 미쳤다. 둘째, 『인도』글쓴이는 거의 유교부식회 회원이거나 내집단 사람이다. 이들이 채운 문예면은 표기 방식에서 중층적이고, 갈래 선택에서 이행기적이며, 창작에서 다갈래적이다. 이런 특성은 그 무렵 다른 유교 매체와 견주어 개방적이고 혁신적이다. 셋째, 『인도』의 시는 식민자 왜로와 피식민자 ‘조선’ 사이의 뚜렷한 이념 경계를 바탕으로 민족정체감과 민족적 의기를 담아내는 데 적극적이었다. 여느 문학 매체의 것보다 압도적이다. 넷째, 『인도』 수필은 이선준의 것이 대표한다. 그는 아산에서 지하 농민조합 활동을 벌이다 고초를 겪은 이다. 그는 ‘조선’의 아들로서 겪는 고통과 외로움을 격정적으로 썼다. 그러한 격정은 그 개인의 것이기도 하면서 그 무렵 지역 계몽 활동에 나섰던 청년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다섯째, 『인도』 소설 6편 가운데 5편을 손재학이 썼다. 그것은 축첩과 대지주의 행패, 가난과 같은, 당대 가족이 겪는 비극적 현실을 그렸다. 그를 빌려 『인도』가 나아가고자 했던 가정 윤리를 간접적으로 계몽하는 역할을 맡았다. 『인도』는 유교 진흥을 위해 낸, 구심성 강한 전문 잡지다. 그럼에도 『인도』는 실국시대 이른바 경학원 체제 아래서 선민 유교, 부왜 유교의 틀에 갇혀 있었던 여느 유교 잡지와 다른 민족 유교, 생활 유교의 실재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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