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임진전쟁과 병자호란 후 충청도 방어체계는 내륙 및 도성 방어를 위한 체계로 바뀌었으나, 제 기능을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軍備 부실과 훈련 부족 때문이었다. 실례로 충청병영의 군비는 軍額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으며, 보유했던 군비는 부실하였다.BR 군비 부실과 훈련 부족의 가장 큰 이유는 재정부족이었다. 18세기 후반부터 실시했던 均役法과 고종 대 추진했던 砲軍 강화정책은 지방군영들의 재정부담을 가중시켰다. 균역법 실시 후 중앙정부는 지방군영들의 줄어든 재정을 지원하지 못했고, 포군의 常備軍化·給料兵化 정책은 지방군영에게 큰 지출을 요구했다. 지방군영들은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수취체계를 정비하는 한편, 지속적으로 새로운 재원을 창출하였다. 충청병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BR 충청병영의 재정은 結役, 身役, 還穀 수입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1년 총 재정은 6,334石(31,670兩)이었다. 충청병영의 주요 수입원은 총 수입의 73%를 차지했던 신역 수입이었으며, 보조 수입원은 환곡 수입이었다. 충청병영의 가장 큰 지출항목은 將士들의 급료였다. 급료 외에 충청병영의 재정은 軍器 수선 · 장사들의 賞給 · 城堞 및 公廨 보수 · 물품 구입 등에 사용되었다.BR 늘 재정난에 시달렸던 충청병영은 무리하게 재정을 운영했다. 그 중 하나가 軍餉穀의 加分이었다. 하지만 군향곡의 분급양이 많아질수록, 未捧米와 虛留穀이 많아졌다. 미봉미와 허류곡이 많아진 이유는 환곡의 賦稅化와 逋欠때문이었다. 충청병영은 포흠을 완화시키고 재원을 보충하기 위해 限年排捧을 실시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BR 충청병영의 재정난은 군비 부실로 이어졌으며, 군비부실은 조선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하나의 원인이었다. 고종 대 충청병영을 비롯한 지방군영의 모습은 조선왕조 몰락의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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