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옥추경』은 조선 초기에 기우제를 위해 중국으로부터 수용되었고, 조선 전기 국행 기우제에서여러 차례 활용되었다. 또한 이 경은 成宗代에 道流의 시험 과목에 포함되어 도교의 주요 정전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 후기의 『옥추경』은 기우제를 위한 성격 외에 救病, 動土 등으로 의미가 확장되어 민간에널리 퍼져나갔다. 『옥추경』의 신앙은 비록 『옥추경』이 도교 경전임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 성행했기 때문에 불교계에서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16세기 불교계의 중심인물이었던 보우는 왕실을 위해 『장수경』, 『약사경』, 『금강경』 등의 불경과 함께 『옥추경』을 금니로 사경을 하기도 했으며, 『옥추경』의 주요 판본들이 무등산 안심사나 묘향산 보현사와 같은 사찰에서 판각되고 인출되었던일은 『옥추경』이 조선 후기 불교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후기 불교 안에 거부감 없이 수용된 『옥추경』은 신중의 도상 차용이라는 방법으로 불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본고에서는 신중도에서 차용한 『옥추경』 신장 도상 가운데 신중의 성격을 분명히 확인 할 수있는 주뢰등천군, 태세은원수, 판부신천군 세 도상의 차용을 살펴보았다. 팔부중에 속하는 가루라와 아수라는 고대로부터 명확한 도상이 계승되고 있었지만, 조선 후기 신중도 제작 화사들은 신중도의 성립 초기부터 대중들에게 익숙한 이미지인 『옥추경』의 주뢰등천군과 태세은원수 도상을 차용하였다. 이는 그만큼 『옥추경』이 조선 후기 불교계에 광범위하게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신중의 주요 호법신 가운데 하나인 조왕신은 이전 시대로부터 계승되던 도상이 존재하지않았다. 조왕신은 부뚜막에서 집안을 살피다가 매달 옥황상제에게 집안의 죄과를 보고하는 家神 인데 이러한 조왕신의 면모와 『옥추경』의 판부신천군이 장부와 붓을 들고 있는 형상이 부합해 조선 후기 화사들은 판부신천군의 도상을 조왕신의 도상으로 차용하기 시작했다. 불교와 도교는 교리나 사상체계가 판이하게 다르지만, 조선 후기 일반 민중이 신앙하는 종교로서의 경계는 매우 모호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복적인 성격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종교적 성상들은 불교나 도교라는 종교의 틀과 관계없이 권능이 있고 효험 있는 존상들을 우선시하며 추앙했다. 이 같이 불명확한 종교 간의 경계는 三敎會通이라는 사상으로 정당성을 얻어 불화에 수용되었으며, 그 중심에 『옥추경』이라는 경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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