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15세기 말엽부터 노동력이 많이 소요되는 石城이 아닌 벽돌성에 주목한 논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燔甓築城, 곧 벽돌을 구워서 성을 쌓으면, ‘일은 절반 밖에 안 되나 공효는 배가 된다’[事半功倍]고 여기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벽돌을 축성의 자재로 쓰면 재정 부담이 줄고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으므로, 경제성‧효율성 측면에서 석성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이들이 많았다.BR 16세기 말엽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중국 병서인 『기효신서』가 도입되어 큰 영향을 끼쳤다. 그와 함께 벽돌을 활용한 중국 城制의 방어시설을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임진왜란과 그 이후 지방 여러 곳에서 벽돌을 활용한 축성공사가 진행되었다. 번벽축성은 ‘중국에서 이미 시험해 본 좋은 방책’으로 여겨졌다.BR 연행사절의 수행원들은 중국 현지에서 목격한 벽돌성의 외양 뿐 아니라, 높이와 폭, 기초 등 제원에 관심을 기울이며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번벽축성을 하려면 벽돌을 굽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따라서 벽돌성에 관심을 보였던 많은 견문기에서 벽돌의 번조 방식에 관해서도 주의깊게 서술한 것을 볼 수 있다. 벽돌 제작 기술을 알아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중국 벽돌가마의 형태, 번벽의 절차와 요령, 벽돌의 종류와 형상 등에 관심을 보였다. 조선의 현실과 비교하면서, 이같은 번벽법의 도입에 열중하였다.BR 청나라에서 번벽 기술을 도입하는 일은 은밀하게 추진되었다. 공개적이거나 공식적인 경로가 아닌 기밀을 탐지하는 수준의 은밀한 접근 방식으로 번벽의 기술과 벽돌 가마의 제원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굳이 이같은 방법을 택한 것은, 병자호란 이후 성지 수축을 금지하는 약조를 받아들여야 했던 조선측 사정과도 관련된다. 벽돌 굽는 기술은 군사적 목적의 벽돌성 쌓기의 수단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청측을 자극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BR 정조대 수원 화성은 벽돌성이 아니지만 많은 벽돌을 활용한 대규모 석성으로 지어졌다. 수원 화성의 축성공사에서는, 영조대 강화외성을 벽돌성으로 짓다 실패한 경험이 크게 참조되었다. 기초공사를 중히 여긴 것도 그 일환이었다. 중국의 벽돌가마를 도입하는 것도 실험적으로 시행했다. 화성에서는 조선의 전통적인 가마와 구별되는 종 형상의 중국식 벽돌 가마가 새롭게 조성되고 운용되었다. 조선 전통의 횡염식 가마를 대신하여 승염식 가마를 만들어 쓴 것 등이 그러하다. 많은 한계를 보이면서도 벽돌생산의 새로운 시도가 이어진 점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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