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이 논문에서 필자는 스리랑카의 비구니 승가의 소멸에 대해 탐구한다. 비구니 승가는 거의 1200년 동안 아누라다푸라(Anurādhapura)에서 번영하였다. 하지만 993년 아누라다푸라가 쫄라(Cōḷa) 침략자들의 손에 넘어가고 아누라다푸라 왕국이 쫄라 제국에 합병되면서 비구니 승가도 사라지게 되었다. 비구 승가도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였지만, 위자야바후 1세(Vijayabāhu I)가 쫄라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나서 복원되었다. 불행하게도 위자야바후 1세와 (빠락끄라마바후 1세를 포함한) 그의 후임 왕들은 비구니 승가 복원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적어도 미얀마 비문들이 13세기까지 미얀마에 비구니 승가가 존속했음을 입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싱할리즈 왕들과 비구들이 사라진 비구니 승가의 복원에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복합적이지만 대체로 세 가지로 유추해볼 수 있다. 한 가지 이유는 여성의 종교적 실천에 대한 애매모호하고 상충하는 모델을 제시하고 여성의 종속성과 하열한 업을 가리키는 간접적 힌트들이 존재하는 빨리 성전에서 찾을 수가 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폴론나루와(Polonnaruwa) 시기에 증대된 힌두교의 반여성주의와 남존여비사상이다. 세 번째 이유는 아란냐까(araññaka) 전통의 대두이다. 이러한 이유들에서 싱할리즈 왕들은 어려운 시기에 제한된 자원들로부터 더 많은 공덕(puñña)을 얻고자 비구 승가를 지원하는 쪽을 선택했던 것 같으며, 비구 승가도 비구니 승가의 존속을 바라지 않았고 싱할리즈 왕들에게 비구니 승가의 복원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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