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近世이래, 簡牘 · 靑銅器 · 碑刻 등 출토 자료가 다량으로 발견되면서, 이러한 자료들은 中國古代의 數量詞 및 量制의 발전과 변화과정을 연구하는데 새롭고 믿을 만한 1차 자료로 활용되었다. 數詞에 대해, 中國은 일찍부터 비교적 完整한 基數體系를 구비하고 있었으며 상용되던 數詞는 “一 · 二 · 三 · 四(亖) · 五 · 六 · 七 · 八 · 九 · 十”과 “百 · 千 · 萬” 등이 있다. 이러한 基本數詞가 출현한 이후, 수천 년 동안 변화없이 계승 사용되었고, 序數와 倍數, 그리고 分數 등이 존재해 여러 곳에 응용되었다. 출토자료에서도 量詞가 많이 보이는데, 대체로 自然單位量詞와 借用單位量詞, 그리고 制度單位量詞의 세 종류로 나뉘며, 이를 또 세분화하여 여러 소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古代量詞體系의 성숙과 발달 양상을 반영하고 있다. 量制는 度量衡制度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며, 中國古代量制의 발전을 중심으로 시대를 나누면, 先秦 · 秦 · 漢 · 三國 이후로 크게 네 가지 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 春秋戰國時期는 量制의 성립과 정비의 시기로서, 출토자료를 통해 齊國 · 楚國 · 三晉의 韓趙魏 · 燕國 · 東周 · 秦國에서 운용했던 量制의 구체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政權의 分裂로 인해 각 국의 量制는 상이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지역성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각 국의 基本單位의 量値는 서로 유사하며, 각 국간의 진법체계 역시 비슷하게 변화해가는 양상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 다. 秦 통일 이후, 秦制가 전국으로 시행되면서, 列國의 制度도 폐지되었다. 秦量制의 基本單位體系는 石-斗-升으로, 升과 斗 사이에 半과 參 등의 分數單位가 있었으며 量制의 小單位인 龠도 존재하였다. 이 시기에 石은 容量과 重量單位의 이중 속성을 가지고 있어 容量 石은 10斗이었고 重量 石의 환산되는 量値는 단일한 값이 아닌 여러 容量에 대응되는 값이 있었다. 이러한 量制單位體系는 戰國秦에서 시작되었고 秦代와 西漢 시기에 계승 사용되었다. 漢代에 이르러 특히 王莽時期에 量制體系는 한 차례 개혁이 이뤄지는데, 標準容量單位이자 官方量器의 명칭이었던 石과 桶은 斛로 개칭되었고, 원래 官方量制에 존재하였던 分數單位의 半과 參은 모두 폐지되었으며, 秦과 西漢에서 장기간 사용되던 升龠進制는 升合制로 바뀌었다. 秦漢量制는 王莽시기에 이르러 비로서 斛-斗-升-合-龠의 “五量”單位體系를 형성하였다. 이중 앞 4개의 단위는 후에 근 2000년간 量制單位의 기본골격을 구성하며 사용되었다. 走馬樓吳簡은 東吳의 상황을 반영하였고, 漢代量制의 小單位體系 또한 이때 조정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中國古代의 量制單位는 처음부터 엄격한 진법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초기의 量制單位는 地域性을 가졌으나 같은 지역의 量制 역시 서로 다른 변화 과정을 거치기도 하였다. 단위가 추가로 만들어지거나 도태되는 상황이 보이고 이에 따라 진법체계도 조정되었고, 量値 역시 변화를 겪었다. 秦漢시기에 이르러, 국가 주도의 量制體系의 기본적 정형화를 이루었고, 당시에 맞게 계속하여 개선되면서 최종적으로 王莽시기에 가장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에는 정권이 바뀌어도 量制單位體系는 여전히 계승되면서 안정세를 유지하였는데, 이는 衡量秩序의 내재적 안정성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후대에 있었던 量制의 變化는 그저 單位量値 표준을 바꾸는 것에 그쳤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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