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운문사의 유물과 기록을 통해 본 가람의 변화상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본고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 번째, 운문사의 창건시기를 삼국시대로 추정하지만 이 시기 가람배치 변화상을 알 수 있는 관련 기록과 유물은 경내에 남아있지 않다. 운문사의 초창기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원광법사와 그 당시 조영된 신라의 사찰과 비교를 통해 초창기 가람배치 형태가 신라 황룡사의 창건기 가람배치와 동일한 1탑 1금당 형식임을 밝혀냈다. 운문사의 통일신라시대 전성기는 38대 경문왕 때로 추정하였으며 이시기 3탑 3금당의 대가람 면모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남겨진 석조물의 조성시기를 추정하여 파악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운문사의 역사에서 가장 전성기를 구가하던 고려시대 가람배치를 『삼국유사』와 『운문사사적기』를 통해 복원해 낼 수 있었다. 이때 운문사에 남아있는 전각의 명칭 중에서 불전보다 승려의 수행과 생활이 가능한 공간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는 점에 착안하여 사찰의 성격이 태조 왕건의 사액에서 밝히고 있듯이 가지산문의 운문선맥을 대표하는 선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세 번째, 조선시대 가람배치는 2005년 시행된 대웅보전 해체수리 공사에서 출현한 1653년과 1935년 가람배치를 비교 분석해 복원할 수 있었다. 1653년 가람배치도상에 등장하는 전각의 숫자는 27동으로 고려 최전성기 가람에 등장하는 30여동의 전각과 비슷한 수치로 조선 중기 운문사의 사역이 결코 고려시대에 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935년 가람배치도상의 전각 숫자가 10여동밖에 확인되지 않고 있어 1653년에 비해 그 수량이 현저하게 줄고 있다. 이는 18, 19세기 운문사 사역이 쇠퇴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자료이다. 또한 현재와 같은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앞쪽에 동서삼층석탑이 나란히 조영되는 형식이 1935년 일제강점기 때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 때에 10여동에 불과했던 운문사의 전각수가 1977년 이후 대대적인 중수를 일으켜 현재 약 30여동의 전각을 갖춘 대가람으로 성장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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