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다사도항은 신의주 남쪽 37㎞에 위치한 부동항이었다.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신의주의 교역량이 증가하자 신의주와 안동 지역 일본인 실업가들은 물자의 운송경비 절감과 운송시간 단축을 위해 다사도항 개발의 필요성을 1910년 이후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그 결과 1920년대 전반기가 되면 총독부는 물론이고 일본 제국의회에서도 다사도항 개발과 신의주 다사도간의 철도부설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BR 이후 다사도축항공사는 제1기(1928년∼1930년), 제2기(1936년∼1938년), 제3기(1938년∼1943년) 등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제1기축항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그 시기에 다사도항은 일본 ‘제국’의 제철 생산량을 좌우할 소화제철소의 입후보지로 주목받았다. 이에 일본 정부와 재벌, 만철과 관동군, 신의주와 조선총독부 등은 소화제철소의 입후보지를 두고서 몇 년간 치열한 각축전을 전개하였다.BR 최종 후보지는 만주의 안산으로 확정되었으나 다사도항이 일본 제철 생산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소화제철소의 입후보지로 주목될 정도로 다사도항 개발은 식민지 조선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BR 제2기축항공사는 일제의 ‘대륙루트론’ 중 하나였던 ‘황해루트’ 개발의 일환으로서 제1기축항공사의 10배에 해당하는 500백 만 원의 자금이 투입된 대규모 공사였다. 제3기축항공사는 조선의 병참기지정책과 연계되어 ‘신의주-용암포-다사도항’을 연결하는 임해지역 공업벨트화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이때부터 다사도항은 남만주의 대련항과 동변도(東邊道)의 동항(東港) 등과 연결되는 서해안 해상물자수송의 트라이앵글의 전초기지로서 주목을 받았다.BR 다사도항 개발과 함께 논의되었던 신의주 다사도간의 철도부설 사업은 1935년 12월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업은 계획했던 일정보다 2년이 늦은 1939년 완공되어 신의주와 다사도항의 물자수송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 일제는 다사도축항공사와 철도부설 사업을 추진하면서 1939년 11월 신의주, 양시(楊市), 다사도항 등 세 지역에 대한 대규모의 시가지계획을 수립하였다. 특히 다사도의 경우 547만평이 공업용지조성지구로 계획되어 있어, 일제가 다사도 지역을 얼마만큼 중시하고 있었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다사도시가지계획은 제3기축항공사가 완공되지 못했던 것처럼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21세기 한반도와 중국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80여 년 전에 추진되었던 다사도항의 개발계획들은 새롭게 해석될 여지를 제공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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