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이 硏究의 目的은 朝鮮王朝 高宗 在位期의 宮闕內 外交場所의 變化 樣相과 그 原因을 밝히는 데 있다. 高宗 在位期 가운데 大韓帝國 以前 時期인 1863년~1895년에 限定하여, 相互條約을 맺고 漢城에 外交 公館을 설치한 駐在國 外交官을 對象으로 宮闕內 어느 場所에서 어떤 儀禮가 進行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外交活動의 質的 變化가 일어나는 1880년을 境界로 두 時期로 나누어 고찰하되, 1863년~1879년까지를 前半期, 1880년~1895년을 後半期로 명명하였다. 즉 前半期에는 淸나라에서 온 使臣으로부터 勅書를 받고 接見하는 儀禮가 國王이 臨御한 宮闕의 正殿에서 거행되었으며, 昌德宮 仁政殿, 景福宮 勤政殿, 慶熙宮 崇政殿, 昌慶宮 明政殿 등이 그곳이다. 그러나 後半期에는 1876년 日本과의 修好條約을 契機로 各國의 外交公館이 漢城府 안에 設置되었고, 1880년 11월 昌德宮 重熙堂에서 日本公使를 接見한 것을 信號彈으로 하여 駐在國 公使나 領事를 國王이 宮闕 안 建物에서 接見하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그런데 國王이 昌德宮에 臨御한 時期에는 주로 昌德宮 便殿, 重熙堂, 熙政堂 등이 接見場所로 活用되었지만, 國王이 景福宮으로 移御한 1885년부터는 景福宮內 峨嵋山 以北의 大妃 寢殿, 王大妃 寢殿, 大王大妃 寢殿등이 29回나 接見 場所로 활용되었다. 또 1890년 以後부터 1895년 俄館播遷으로 景福宮을 비우기 前까지는 再建이 完了된 康寧殿, 交泰殿 領域에서 10餘 回의 接見이 擧行되었고, 香遠池 周邊의 乾淸宮과 長安堂, 集玉齋와 寶賢堂, 集慶堂과 咸和堂 등 大內 別堂에서 40여 回의 接見이 이루어졌다. 이렇듯 朝鮮의 首都 漢城에 設置한 公館에 駐在하는 外交官이 朝鮮의 國王을 陛見하는 外交 節次와 儀禮는 1880년 11월 이후에 새롭게 시작된 것이며, 조선시대 交隣 外交의 節次와 儀禮를 參酌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國王이 西洋 여러 나라의 儀禮에 關心을 表明하고 이를 反映하는 過程에서 점차 拜禮를 廢止하고 손 인사와 서서 하는 揖禮로 간소화하였다. 接見儀禮의 簡素化로 接見場所를 便殿이나 便殿 性格의 건물에서 해야 할 必然性은 줄어들었으며, 大內의 別堂에서도 얼마든지 거행할 수 있는 의례로 변경되었다. 昌德宮에서 景福宮으로 移御했을 때에는 便殿이나 寢殿 영역이 燒失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國王 高宗이 接見場所로 선택할 수 있었던 곳은 외교장소로는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던 大內의 寢殿이나 別堂이었다. 물론 大內의 寢殿이나 別堂을 고루 外交活動의 舞臺로 사용한 것은 완전히 새로운 宮闕 運用方式이었다. 大內 깊숙이 外臣의 발길조차 허용하지 않던 곳에 外國의 外交官이 자주 드나들면서 景福宮 全體가 政治的인 空間으로 탈바꿈되었고, 傳統的인 宮室制度의 二分法은 그 意義를 喪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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