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영남지역의 남인은 중심인물이던 이현일이 숙종대 갑술환국으로 화를 당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왕실에 대한 죄인이라는 낙인은 이현일을 따르는 많은 영남 남인을 억누르는 기제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영조 초년에 일어난 戊申亂에 영남 남인 일부가 가담한 것으로 인해 재차 타격을 받게 되었다. 영조의 탕평책으로 인해 운신의 폭이 조금 넓어졌으나, 중앙 정계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확보하기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류정원이 활동한 시기는 바로 이 어려운 시기였다. 그는 안동의 유력가문 중의 하나인 전주류씨 가문 출신으로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학통을 이은 김성일의 학맥에 연원을 두고 있었다. 그는 영조대에 활동한 영남남인의 대표적인 존재 중의 한 명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사학계에서 류정원 개인에게 관심을 보인 연구는 없었다. 본고는 류정원을 통해 영남이라는 지방에 거주하는 크게 현달하지 않은 가문 출신의 남인이 관계 진출 과정에서 겪은 견제와 시련, 그리고 관직 생활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았다. 남인 차별, 지방 차별, 가문 차별의 삼중고 속에서 한 관료가 겪은 구체적인 모습을 살핀 것이다. 그는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관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나 지방의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는 臺官의 지적에 따라 탈락하였다. 이후 재출사하기까지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후 淸職인 홍문관 관원이 되기 위한 후보자 명단인 도당록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다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였다는 대관의 지적과 견제로 인해 좌절되기에 이르렀다. 출사 초반 두 차례의 좌절은 심리적인 위축과 더불어 관료로서 성장할 적정 시기를 놓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도 그는 도와주는 주변인물을 만난 덕에 재기할 수 있었다. 그가 관직 생활에서 스스로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던 것은 서연에 참여하여 세자를 수개월동안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이 때 그는 자신이 가진 경학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국왕으로부터도 여러 차례 칭찬과 관심을 받았다. 그는 세 지방의 수령을 도합 4년 남짓하면서 목민관으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후일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심서』에 우리나라 관료로서는 가장 많은 12회나 모범 사례로 인용되었다. 마침내 당상관에 올랐지만 이미 50대 후반의 나이에 건강이 좋지 않은 때였다. 세자의 공부와 마음 다스리기를 강조한 대사간 사직소를 마지막으로 올리고 생을 마감하였다. 류정원에 대한 본 연구는 영남 남인 계열의 한 출중한 인물을 한국사학계에 소개하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아울러 영조대 탕평정국과 벌열정치 하에서 지방인 영남지역의 비집권세력인 남인의 처지를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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