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군기시는 조선이 개국하면서 국내외의 불온한 정세에 대비하여 고려의 제도를 계승해 설치된 무기 제조국이다. 군기시에서 제작된 다양한 냉병기 가운데 궁시는 조선의 대표적인 長技로, 火器가 지닌 과도한 비용 초래·긴 발사 시간·날씨의 제약 등 단점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담당하며 오랫동안 그 위상을 유지하였다. 군기시의 궁시는 여타 무기들처럼 태종대 이후 물적·인적 자원이 집중되면서 세분화된 장인들의 공정을 통해 매달 꾸준히 생산되었고, 점차 무기의 질적 수준이 평준화되고 규격화되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조선은 백성들에게 배정된 과도한 貢上과 군기시 장인들에게 부과된 불공평한 업무 분장으로 인해 군기 제작 방법을 다각도로 변통하고 조정해야 했다. 하지만 세종대 이래 성종대까지 북방 여진족과의 전쟁이나 변란 등으로 인해 화기류는 물론 궁시류의 수요가 크게 확대되면서, 자연히 군기시에 소속된 궁시 담당 장인의 인원수도 꾸준히 증가하였고, 水牛角의 수입·전죽 생산 확대·대체품의 접목 등 보다 위력 있고 효율적인 궁시 제작을 위한 다양한 기술 개발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세조대에 더욱 두드러진다. 이렇게 생산된 궁시는 군기시 무고에 저장되어 일정하게 點考를 받았고, 點火 과정을 거치며 유치되었으며, 낙인을 통해 유실을 차단하였고, 기술과 정보가 외국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엄격히 단속되었다. 하지만 궁시는 까다로운 관리 방법으로 인해 시기와 지역을 불문하고 무용지물로 적체되는 경우가 많았고, 결국 조선은 양란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후 군기시는 5군영에서 조총·화포 중심의 화기류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구조 속에 그 규모와 역할이 자연히 축소되는 역사적 흐름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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