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본고에서는 조선전기에 제정된 <몽금척> 악장 및 정재가 조선후기 들어 다양한 방식으로 전승된 양상을 살펴보았다. 또한 그러한 양상이 나타나게 된 맥락을 작품 내외의 사안들과 연계 지어 분석하였다. 영조는 연행 목적과 청중의 반응을 고려하여 정재의 절차를 탄력적으로 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으며, <몽금척>에도 이러한 지론을 적용하였다. 그는 무원의 수를 4인 줄임으로써 정재를 보다 간결하게 연행하고자 하였고, 기존의 창사를 대치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몽금척사>를 지어 정재에 활용하였다. 더 나아가, 서로 다른 곡목인 <몽금척>과 <하황은>을 엮어 연행하는 방식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영조는 <몽금척>에 표출된 상서가 창업의 조짐을 보여주는 핵심적 지표가 된다고 여겨 그 내용을 짧고도 인상 깊게 현시하는 한편, 창업의 영광이 자신의 대에까지 면면히 이어진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 <하황은>을 개작하여 어제 <몽금척사>에 덧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대에는 <몽금척> 정재의 의례를 다시금 복구하는 방향을 택하였다. 선왕들에 의해 정식화된 정재의 절차를 과도하게 변개하기는 어렵다는 현실적 우려 때문으로 파악된다. 다만, 영조가 시도했던 개편의 흔적은 그러한 복고적 성향 속에서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선 영조의 어제 창사가 정조대에는 치어로 전용되었다. 종래의 규례를 준용하여 정재를 연행하되, 영조의 어제를 완전히 방기할 수는 없는 만큼 정재 전체에 큰 무리를 주지 않는 수준에서 적절한 활용법을 고안해 낸 형상이다. 또한 창사의 일부를 반복하여 부르도록 한 󰡔악학궤범󰡕의 규정을 폐하고 창사 전체를 무원들이 한 차례만 제창하도록 간소화하였다. 영조는 시종 <몽금척> 정재를 속도감 있게 구성하려 의도하였거니와, 그러한 지향이 정조대에 이르러 다소 다른 측면으로 실현되었던 것이다. 계승과 변모의 양 측면을 지니고 있는 정조대의 연행 방식은 고종대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어 오늘날 전해진다. 조선후기에 이루어진 <몽금척> 관련 논의의 상당수는 궁중 악장과 정재에 관한 것이지만, 몽금척 사적 자체의 의미를 널리 현창할 방안을 모색한 논의들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영조는 세손 정조에게 군왕의 책무를 일깨우기 위한 자리에서 몽금척 사적을 비중 있게 거론한 바 있다. 그 영향 때문인지 몽금척 사적은 정조대에 들어서도 거듭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정조는 태조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관원들에게 시행한 제술의 제목으로 ‘금척’을 지목하였으며, 당대의 문사인 이용휴는 <몽금척송>을 지어 금척의 상서가 태조의 실덕과 연계되는 부면을 부각해 내었다. 순조 또한 문신들에게 몽금척 사적에 관해 제술을 하도록 독려했던 정조의 방식을 계승하였고, 고종은 훈장 조례를 반포하면서 제국 최고 영예의 훈장을 금척대훈장으로 정하였다. 한편, 19세기에 이르면 몽금척 사적이 지역적 기반과 결부되어 확산되는 사례가 나타나기도 한다. 정도전의 전문에 따르면 몽금척의 상서는 창업이 이루어지기 십수 년 전에 일어났다고 하였다. 당시의 가장 큰 사건은 지리산 부근에서 벌어진 황산대첩인데, 몽금척 사적이 지역색을 띠게 되는 단초가 여기에 있다. 몽금척을 황산대첩과 연계 지은 사례는 성종대 유호인의 <황산가>에서도 일부 찾아볼 수 있지만, 19세기 후반 경에 이르면 전라도 진안이라는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몽금척의 현장이 곧 경내의 마이산 일대라는 전승이 널리 퍼지게 된다.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하여 고종은 전국에 산재한 왕실 선조들의 사적을 탐문하고 현창하는 데 열의를 보였다. 황산대첩을 매개로 태조의 몽금척 상서와 마이산을 연계 지으려는 진안 지역의 움직임 역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배태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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