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전의 이씨 대사성공파는 7세 이천(李阡)까지 주로 무관직에 진출하였고, 고려 말에 이언충(李彦冲) 등이 계속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조선 개국 후 이구직(李丘直)․이사관(李士寬)․이서장(李恕長) 등이 공신이 되어 정치사회 기반을 강화하였다.<BR> 이후에도 이원효(李元孝)․이덕숭(李德崇) 등 여러 명이 거듭 과거에 급제하면서 16세기 중반까지 확고한 정치사회 기반을 유지하였다. 특히 3대에 걸쳐 4명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면서 가세가 더욱 확장되었다. 이 가계는 15세기 후반 이신효(李愼孝)가 충주에 입향한 후 지역사회에서 유력한 사족의 하나로 활동하였다.<BR> 충주 전의 이씨 묘역에는 8대에 걸쳐 모두 40상(像)의 문석인(文石人)․무석인(武石人)이 한 곳에 모여 있어, 전국에서도 드문 사례로 주목된다. 문석인(文石人)의 복식은 복두(幞頭) 공복형(公服型)이 24상(像)이고, 양관(梁冠) 조복형(朝服型)이 12상(像)이며, 무석인(武石人)은 4상(像)으로 모두 투구(鬪毆) 전포형(戰袍型)이다. 이것들은 대체로 15세기 후반~17세기 후반에 조성되었고, 그 크기는 피장자의 품계보다 당시 후손들의 정치사회 지위와 경제력 등과 관련되어 다른 지역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BR> 복두 공복형은 16세기 후반까지 나타난 가운데 양관 조복형은 16세기 전반에 등장하여, 충주 전의 이씨의 양관 조복형의 조성 시기는 다른 지역보다 앞섰다고 하겠다. 복두 공복형이 17세기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들이 양관 조복형 문석인을 더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투구 전포형 무석인은 16세기에 조성되었으며, 무석인의 복식 양식은 규정에 얽매이지 않은 보다 자유로운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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