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최치원이 말년을 보낸 경남 합천 해인사는 그의 은거지 또는 종신지로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지역학 연구의 차원에서 최치원과 합천 해인사와의 인연과 행적, 그리고 관련 저술들에 대해 짚어보고자 했다. 특히 해인사 기록자로서 최치원의 활동에 초점을 맞춰, 그가 남긴 해인사 관련 기록과 활동을 은둔 이전과 이후로 나눠 살펴보았다. 먼저, 최치원은 함양태수 시절에 여러 차례 해인사에 들러 친형 현준과 희랑대사를 만났고, 승려 승훈과도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이는 그의 시문 「희랑화상에게」(895), 기문 <해인사묘길상탑기>(895)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그는 진성여왕에게 나라의 기틀을 바로세우기 위한 <시무십여조>를 올렸지만, 그 개혁안이 시행되지 못하고 자신의 포부를 더 이상 펼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최치원과 해인사의 인연은 그의 은둔 시기와도 맥을 같이한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최치원은 해인사에 은둔하면서 많은 글을 지었다. 시문과 기문의 저술, 찬문과 승전의 찬술이 그것이다. 그는 기문으로 <신라가야산해인사결계장기>(898)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900), 시문으로 「가야산 독서당」을 남기고 있다. 또한 그는 찬문으로 「순응화상찬」과 「이정화상찬」, 승전으로 『석순응전』과 『석이정전』, 『부석존자전』, 『법장화상전』(904) 등을 저술했다.

Full Text
Published version (Free)

Talk to us

Join us for a 30 min session where you can share your feedback and ask us any queries you have

Schedule a c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