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정선(鄭歚, 1676-1759)의 《양천십경첩(陽川十景帖)》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내에 포함되어 있다. 정선은 1740년에 양천(陽川,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일대)의 현감(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1740년에서 1741년 사이 정선은 자신의 현아(縣衙) 주변의 풍경을 10경으로 선정하여 이를 《양천십경첩》으로 제작하였다. 정선이 《양천십경첩》을 제작한 목적은 그가 양천에 현감으로 부임한 후 자신의 관직 생활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정선은 이 화첩을 그의 집안에서 대대로 전승하기 위한 ‘가전화첩(家傳畫帖)’으로 기획하여 제작하였다. 《양천십경첩》에 포함된 작품들은 양천 현감으로서의 정선을 보여주는 일종의 자화상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표현적인 작화(作畵) 태도는 이전 시기 금강산도(金剛山圖) 제작 과정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1740년경 정선은 《양천십경첩》을 통해 사대부적 자아를 새롭게 표상하고자 하였다.<BR> 《양천십경첩》은 가전화첩으로 제작되었지만 당대의 많은 문예계 인사들이 이 화첩을 감상하였다. 현재 다수 전하는 정선의 양천 지역 실경산수화들을 통해 유추해봤을 때 당대에 이미 이러한 작품에 대한 상당한 수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선 역시 《양천십경첩》을 제작할 당시 자신의 작품이 많은 이들에게 감상될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정선은 《양천십경첩》을 통해 자신을 사대부(士大夫)로 표상(表象)하고자 하였다. 본래 사대부 출신이지만 직업화가와 같은 삶을 살았던 정선은 사회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자 사대부 화가로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따라서 정선이 《양천십경첩》을 통해 사대부적 자아를 표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그의 치밀한 예술전략 속에서 이루어진 행위이다. 또한 이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정선의 양천 지역 실경산수화를 감상한 이들은 양천을 ‘정선이 관직을 했던 곳’으로 인식하였다. 정선은 《양천십경첩》을 활용하여 당대인들의 양천 지역에 대한 인문지리(人文地理)적 인식을 변화시켰으며 자신의 화명(畫名)을 높였다. 결국 《양천십경첩》을 통해 정선은 직업화가가 아닌 진정한 사대부 화가이자 양천 지역을 다스리는 현감으로서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BR> 정선은 평생 화가로서 자신의 정체성 및 자아를 기민하게 변화시키며 예술계에서 생존해나갔다. 화가였던 정선은 본인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정선의 능동적인 작가상(作家像)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양천십경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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