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고려말 양주의 호장을 세습하다가 조선건국과 함께 중앙으로 진출한 양주조씨는 태종의 부마를 배출하는 등 곧 중앙정계의 주요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계유정난이 발생하면서 양주조씨 구성원들은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다. 여러 양주조씨 구성원들이 화를 당하였으나, 세조 측에 가까웠던 양주조씨들은 가문의 성공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중앙 권력에 가까웠던 양주조씨들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서 이렇게 정치적 선택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이 선택은 양주조씨의 핵심 가계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친족 내 서로 다른 정치적 선택과 그로 인한 문제는 노소 분기 이후 발생한 신임옥사에서 절정에 달했다. 종형제였던 조태채와 조태구는 각각 노론과 소론의 영수로 경종대 붕당 갈등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결국 조태채가 사사되었다. 그러나 영조의 즉위 이후 상황이 변화하였고 충역의 의리가 뒤바뀌면서 조태채의 후손들만 권력의 핵심부에 남게 되었다. 족보의 돌림자 사용의 양상을 보더라도 정치색을 달리하며 갈등했던 이 가계들이 다시 화합하는 데까지는 200년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조선후기는 일반적으로 부계 친족집단이 발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주조씨의 사례는 친족집단이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을 가진 가족들로 인해 얼마든지 갈등하고 분화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주요 가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후기 부계 친족집단의 강화와 확대라는 틀에 갇혀 있던 가족들 다양성과 역동성을 되살려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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