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조선시대 수군의 발전은 고려 때부터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져 왔다. 고려말 경인왜구(1350) 이후 연해지역 백성들이 내륙으로 이주할 정도로 국가운영의 심각한 위기상황이 초래되었다. 이에 조선 건국 직후부터 해방강화를 위한 정책이 시행되었으며, 이는 수군의 발전으로 백성들이 다시 연해의 옛 고을 및 도서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선 초기 목포진의 설치는 이러한 수군의 발전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특히 조운로상의 주요한 포구이자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BR 목포는 나주 목포와 무안 목포가 있었는데, 무안 목포는 나주 목포에서 이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바다로 나아가므로 ‘목포’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목포진은 기존 연구에서는 현재 목포만호성지에 1439년 설치된 것으로 논하고 있으며, 그 이전의 목포진의 위치는 대굴포 혹은 당곶 등 다른 곳으로 추정하였으나 『세종실록지리지』의 관련 내용을 분석해보면 1425년~1432년 사이의 목포 만호진 역시 현재의 무안현 목포(목포만호성지)에 있었다.BR 한편, 목포진과 전라처치사영의 이동과 관계된 주량의 위치는 현재 전라우수영 자리가 아닌 황원 등산진 부근에 있었는데, 이 주량의 지리적 위치는 무안 목포와 기각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 목포진이 1432년에 옮겨왔다가 1433년 수군진 명칭을 ‘주량’으로 고침으로써 수군진 ‘목포’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주량진으로 운영되다가 1438년 진도 남도포로 병선을 옮기고 남도포 만호진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주량진은 사라졌다. 그러다 1439년 다시 무안현 목포에 만호진을 설치함으로써 7년 만에 복설된 셈이었다. 이때 무안현 목포에 수군진 설치의 이유가 목포 주변에 수군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1432년 전라처치사영을 목포로 옮기기로 결정했던 사안이 실행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BR 따라서 전라처치사영의 연혁을 정리하면, 옥구현에 있던 수영을 1408년 경무안현 대굴포로 옮겼으며, 1432년 목포로 이전하기로 하였으나 실행되지 않았고 1440년 대굴포에서 현재의 전라우수영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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