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본 논문은 사도세자의 生母로 아들의 죽음에 결정적인 계기로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暎嬪 李氏의 사당인 의열묘의 건립과 의례정비를 통해 영조의 정치적 의도를 해명한 것이다.<BR> 영빈은 사도세자의 3년 상례 직후에 사망했는데, 영조는 후궁임에도 불구하고 壯洞에 있는 영빈방에서 치러진 상례에서 모든 절차를 주관하였다. 영빈방에는 영빈의 사당인 의열묘가 건립되었는데, 사도세자의 사당인 垂恩廟의 재실을 훼철한 재목을 사용하고 그 경역을 포함하였다. 영조는 상례에서 세손과 혜경궁이 수행할 의례를 검토하여 情理를 표하게 함으로써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의 위상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행장과 묘지, 『御製表義錄』을 지어 사도세자 사사와 관련된 영빈의 역할을 공포하였다.<BR> 영조는 사도세자를 창경궁의 文政殿에 설치된 정성왕후의 혼전(徽寧殿)에서 사사하였는데, 당시에는 貞聖王后가 자신에게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變在呼吸之間]’고 알려주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영빈 사후에는 고변의 주체였던 ‘모친’을 정성왕후에서 영빈으로 바꾸었으며, 『어제표의록』에서 그 역할을 구체화하였다.<BR> 영조는 영빈이 영조와 아들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宗國이 있음만을 알아 나를 위하여 그의 私恩을 끊었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따르면 영조가 사사 후 세자의 위호를 복구하고 사당을 세워준 것은 영빈이 스스로 끊은 私恩을 복구시킨 것이다.<BR> 영조가 사도세자와 영빈의 무덤과 사당의 이름을 ‘垂恩’과 ‘義烈’로 정한 것은 이러한 사사의 의리를 정립하려는 것으로, 영빈의 무덤과 사당에 국왕의 사친에게만 적용하는 宮園制를 적용함으로써 영빈의 결단과 공헌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영빈의 후손인 세손의 왕통을 보강하려는 영조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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