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1596년 명에서 礦稅의 폐단이 시작되었다. 광세란 광산 개발에 부과하는 세금이고 상세는 영업세와 유통세를 가리킨다, 당시 명은 萬曆三大征을 치르 는데 필요한 戰費, 자금성의 화재를 복구하는데 필요한 비용, 황태자 혼례 비 용 등으로 막대한 금액을 소모하여 재정이 고갈될 위기를 맞았다. 神宗은 각 지에 환관을 보내 광세를 징수하게 했는데, 징수 과정에서는 수탈과 폭행, 횡 령 등이 만연했다. 이것이 바로 광세의 폐인데 그것을 계기로 明末 사회는 도탄에 빠졌고 곳곳에서 民變이 발생했다. 高淮는 1599년 요동에 礦稅使로 파견된 환관이다. 그의 수탈과 악행 때문 에 요동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고회의 수탈은 조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부하들을 조선에 보내 인삼, 화문석 등 각종 토산물들을 징색했 다. 고회는 조선에서의 징색을 당연하게 여겼는데 그 배경에는 명이 왜란 당 시 망해가던 조선을 구해 주었다는 施惠者意識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편 임 진왜란 이후 수많은 명군과 상인들이 조선을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조선 사정 을 잘 알게 된 것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조선은 고회의 광세 징수를 막으려고 했지만 명의 ‘은혜’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결국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은 고회의 징색 때문 에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고회는 1602년 조선을 압박하여 中江開市를 존속시켰다. 그것은 임진왜란 초 조선이 명으로부터 군량 등을 수입하기 위해 임시로 개설된 것이다. 하지 만 시간이 지나면서 양국의 모리배들이 몰려들고, 분쟁이 발생하는 등 문제 점이 생기자 조선이 폐쇄하려 했다. 고회는 조선 정부를 압박하여 시장을 존 속시키고 상인들에게 영업세를 징수했다. 고회는 은을 챙기기 위해 중강개시 를 존속시키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고회가 조선에서 각종 물자를 징색하고 중강개시를 존속시켜 징세한 것은 광세지폐가 변형된 형태로 재현된 것이었다. 더욱이 선조 말년 이래 조선에 왔던 명 칙사들은 엄청난 액수의 은을 수탈했다. 칙사들의 수탈에 고회의 징색이 더해지면서 조선은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그 때문에 당시 조선 경제 회복을 위해 절실했던 은광 개발 등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광세지폐는 요동을 피폐하게 하고, 광해군대 조선이 ‘반명감정’을 품게 되는 토 양을 제공함으로써 누르하치가 굴기하는데 일조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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