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여말선초의 왜구에 대한 연구는 『고려사』・『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의 왜구 침구 기사가 가장 중요한 근거사료가 되어왔다. 그런데, 특히 고려 말 왜구의 경우, 그 기록은 왜구에 의한 피해나 이를 격퇴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만으로는 왜구의 주체나 목적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면이 많다.BR 제주도는 지정학적으로 일본열도와 한반도, 중국대륙을 연결하는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왜구가 창궐했던 시기에 제BR주도에도 왜구사건이 많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고려사』의 기록은 실질적으로 단 1번뿐이고 조선시대에도 다른 지역과 비교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BR 그런데, 17세기에 간행된 서적으로 李元鎭(1594~1665)의 『耽羅誌』(1653년 간행)나 金尙憲(1570~1652)의 南槎錄(1669년 간행)에는 『고려사』・『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제주도로의 왜구 침구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충숙왕 후2와 후3년(1341・2), 충정왕 3년(1351), 공민왕 1년(1352)과 8년(1359), 우왕 2년(1376)의 6회, 조선시대는 태종시기의 5~6건, 문종 1년의 1건으로 총 12~3건의 기록이다. 이들 기록은 당시 제주도에 전해지고 있었다고 여겨지는 제주도의 지방기록인 『地誌』를 근거로 한 것이다.BR 『지지』의 기록은 간략하고 단순한 내용이지만, ‘정사’에는 없는 기록들이며, 왜구사건이 발생한 제주도의 구체적인 지역명이 나타나는 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이들 기록을 통해 기존의 왜구에 대한 설명 및 주장을 재고할 필요성도 생긴다. 『고려사』의 기록만을 근거로 ‘제주도는 왜구가 목표로 했던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왜구가 제주도에 오지 않았던 것’이라는 방식의 기존 설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지』의 기록 중에는 충정왕 2년(1350) 추자도의 주민을 제주도로 이전시켰다는 내용도 있다. 이것은 고려 말에 시행된 空島 정책이 추자도에도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BR 『지지』의 기록은 비록 한계성이 있지만, ‘정사’를 보완하는 자료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방기록 혹은 개인문집에 실려 있는 왜구기록의 재발견은 아직도 많은 가능성이 남아있으며 이는 왜구의 기본 문제를 규명하는 데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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