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본고는 『同文彙考』의 「使臣別單」과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에 보이는 문견보고에 나타난 면전과 섬라에 대한 담론을 고찰함으로써 조선 후기 사신들의 동남아시아 나라에 대한 정보수집 활동의 내용과 그들에 대한 인식, 정보 수집 활동의 취사 양상을 살펴보았다.BR 17세기 明淸 교체기에 조선 국내에서는 ‘華夷論’이 정계의 대중국 인식을 주도한 상황에서 명나라의 유민, 즉 남명 세력의 동향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때 특히 남명 정권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가 피난하러 면전에 들어간 것이 조선 사신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 고사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계속 언급되어 왔지만 시대가 내려오면서 면전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긴다. 17세기에는 면전은 명나라의 도통, 즉 명나라의 정권을 회복시킬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면전에 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있었다. 하지만 18세기에 이르면 청나라 정권이 안정되면서 조선 사신들은 명나라가 이미 멸망했다는 사실을 잠차 인정하게 되었으며, 남명 정권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가 면전에 들어갔으므로 명나라의 도통은 면전의 국운이 끝나는 날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 18세기에 들어서면 면전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드나 18세기 말에 벌어진 면전과 중국 간의 전쟁은 다시 조선 사신으로 하여금 면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게 하였다. 이때 면전에 대한 정보 수집 활동은 중국에 대한 관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9세기에 들어가면서 명나라의 도통이 이미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면전은 더 이상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직 관찰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즉 면전은 의례적으로 기록을 남겨야 할 존재가 되었다. 때문에 19세기에 면전에 관한 기록이나 담론은 모두 면전 사신들의 복식과 외모, 언어 등에 국한된다.BR 섬라의 경우, 조선왕조 건국 전후에 섬라곡국 사신이 입공하러 온 고사가 후일에 섬라를 언급할 때 거듭 등장한다. 조선 문인들이 면전을 언급할 때 명나라 말기의 운수와 연결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다면, 섬라를 언급할 때는 조선왕조 건국 때의 강성함과 연관시켜 말하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사신들은 이러한 섬라국의 외교 자세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그러나 섬라에 대해 호감을 가지되 섬라에 관한 정보를 소극적으로 수집한 것도 사실이다. 1767년에 벌어진 면전과 중국의 전쟁이 그 해에 바로 사신별단에 기록된 것과 달리, 같은 해에 꽁바웅 왕조가 섬라를 정복한 일은 거의 50년이 지나서야 사신별단에 기록되었다. 물론 정확하게 기록된 것도 아니다. 조선 사신들의 문견보고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 사신들의 관심사와 정보 수집 활동의 배경 및 동기 등을 함께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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