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남긴 서한들은 선교사제의 시각 에서 1839년(기해) 교옥(敎獄)의 원인, 경과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가 작성한 ‘박해 보고서’는 1839 년 교옥 당시의 생생한 현장을 전해주고 있다. 1830년대 후반 선교사제의 노력과 신자들의 열성에 의해 조선천주교 의 교세는 확장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신자들 사이에 배교자들도 존재했 고 포졸들의 약탈과 체포가 이어졌다. 기근이 들었던 1838년에는 신자 체 포 사건들이 서울 인근과 지방에서 연이어 나타났는데, 선교사제 사이에는 안동 김씨가 주도하는 조선 정부가 박해를 확산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와 대규모 박해가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이 교차하고 있었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1838년과 1839년 초에 산발적으로 발생했던 신자 체포 사건이 1839년 4월 7일 사건을 계기로 본 격적인 천주교 교옥으로 비화되었다. 서양인 선교사제의 존재가 탄로나고 척사여론이 거세지면서 천주교에 적대적인 풍양 조씨 세력이 정국의 주도 권을 잡았다. 4월 18일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이 반포되고 공식적인 옥 사로 전환되었다. 조선 정부는 처형보다는 배교를 시키는데 중점을 두고 고문과 회유 방 법을 동원했다. ‘유다스’라 불리는 일부 배교자들은 다른 신자들이나 선교 사제의 체포에 앞장섰다. 박해가 치열할수록 신앙을 지킨 순교자가 늘어 났고 그와 함께 배교자도 늘어났다. 피신 중이던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는 선교사제들이 나서야 한다 는 일부 신자들의 생각에 동의하면서 자신은 순교하는 대신 다른 동료 사 제들을 해외로 탈출시키려 했다. 그러나 모방·샤스탕 신부는 그 계획의 위 험성을 지적하고 계속 조선에 남기로 했다. 더 이상 피신할 수 없는 상황에 서 앵베르 주교는 스스로 나가 붙잡혔고, 박해를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다 른 선교사제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주교의 지시에 순종 한 모방·샤스탕 신부는 스스로 나가 잡혔고, 결국 세 선교사제의 순교를 계기로 1839년의 교옥은 가라앉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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