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본고에서는 유럽에서 한국학 및 동양학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세기 말에 주목하여, 이에 영향을 준 일본에서의 國學연구에 대해 주목해 보았다. 초기 유럽의 고대 한・일관계사 인식에서 일본 국학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학자들의 『일본서기』 연구를 중심으로 그들의 인식과 국학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다. 『일본서기』에는 한‧일관계사 인식에 결정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이 기술되어 있다. 이 신공황후 설화에 기반 한 일본의 神國思想과 대외의식은 대외적 긴장감이 높아질 때마다 강렬하게 표출되었다. 국학자들의 『일본서기』 연구 이전인 鎌倉시기에서 南北朝시기에도 『일본서기』는 황실에서 중요한 역사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근세와 『일본서기』를 단독으로 연구한 것은 아니었다. 근세에 들어 국학의 출발은 중국의 고전적 텍스트에서 고대 일본의 텍스트로의 변화에 초점을 두었다. 국학자인 荷田春満는 고전으로의 회귀를 기본으로 『일본서기』 神代紀기사가 道를 알기 위한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하였다. 賀茂真淵는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에서 고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고전’으로서의 의의를 보기 시작하였고, 텍스트에 대한 엄격한 문헌학적 방법론과 일본 중심주의적 세계관을 보여주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국학의 집성자인 本居宣長를 통해서다. 그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임으로써 일본중심주의적 세계관 및 역사 인식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平田篤胤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러나 平田篤胤는 本居宣長까지의 『고사기』에 대한 절대적 정통성으로부터 이탈해 나갔다. 국학자들은 점차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세계관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통해 고대의 언어와 신화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과 일본 중심주의적 세계관을 형성해 나갔다. 그러나 고대의 일본 중심적 세계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이라는 국학의 특징에도 불구하고, 국학자들에게서 보이는 문헌에 대한 실증주의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는 서양의 학자들이 일본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일본서기』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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