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이 논문에서는 먼저 근대 일본의 섭정(攝政) 설치에 관한 규정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다음으로 다이쇼(大正) 천황의 건강 문제가 어떠한 정치적 공백을 가져왔는지에 대해 검토했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공백이 섭정 설치를 통해 어떻게 극복되었는지를 알아보았다. 섭정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제도의 기안자들은 의회가 섭정을 비롯한 왕위 계승 문제 전체에 관여할 수 없도록 하고, 이 문제가 가능한 한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는 일이 없게 하도록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쇼 천황의 건강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악화되어감에 따라, 섭정 설치 문제는 정치 문제로 비화되게 되었다. 다이쇼 후기 정부를 이끈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천황의 건강 문제는 황태자를 섭정으로 임명하는 것을 통해 극복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황태자의 혼인 문제와 같은 황실 내부 문제는 천황의 빈 자리가 정치 지도자들의 협력만으로는 완전히 채워질 수 없는 것임이 명백히 드러났다. 이에 일본 정부 지도자들은 섭정의 설치를 결의하였고, 1921(다이쇼 10)년 11월 25일, 황태자 히로히토(裕仁)는 섭정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중대한 모순이 발생했다. 섭정 임명의 이유를 국민에게 설명하기 위해, 천황이 정무를 볼 수 없는 상태임을 10월 4일 이미 공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수상을 임명한다는 중요한 결정이 강행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섭정을 임명할 정도로 천황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사실과, 흐려진 판단력 하에서 수상 임명이라는 중요한 국무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서로 모순된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점은 논란으로 비화되지 않았고, 황태자의 섭정 임명은 그대로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이렇듯 섭정 임명 과정이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하지 않았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첫째로, 섭정 설치 과정에서 보인 정부 지도자들의 정치적 지도력을 들 수 있다. 원로들과 하라 수상, 마키노 궁내대신 등 지도자들은, 미리 완성된 제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따라 매끄럽게 일을 처리하였으며, 섭정 설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황족과 추밀고문(樞密顧問)들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두 번째는 황태자에 대한 여론의 기대와 지지를 이유로 들 수 있다. 유럽 순방을 통해 젊고 건강하며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갖추게 된 황태자는,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천황의 건강 문제가 사실로 드러난 상황에서, 황태자가 천황을 대신해 섭정으로 통치한다는 것에 대해, 반대 의견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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