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한국 의례는 근대화 논리와 서구 기독교 영향, 그리고 식민지 정책이라는 세 가지 중첩된 압박 속에 ‘근대적’으로 변모했다. 혼례는 대체적으로 기존의 전통혼례에서 비판받던 부분들을 개량하고 선택적으로 서구의 요소를 수용함으로써 혼합의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혀 아무런 갈등 없이 순식간에 대중화된 것은 아니었다. 혼례에서 예(禮)를 담아내는 방식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신식혼례 안에 교회 언어로 유입된 혼인동의의 양식은 서양의 역사성에 기반한 것으로, 한국 전통혼례에서 고수하는 ‘침묵’과 상충되는 것이었다. ‘침묵’은 유교적 덕목과 민간신앙의 속신으로 강화되어왔고, 전통과 근대가 부딪히는 접점에서 전통혼례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그 대척점에 선 비침묵으로서 ‘언어’는 교회의 권위에 통합하는 순종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지배적 권위와 의례가 요구하는 변화는 몸 안에 체화되어온 침묵의 가치가 급격하게 배제되는 데 대한 경계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침묵’으로 전통의 권위와 긴장을 유지하던 혼례는 도시와 농촌, 시간의 흐름, 혼인 당사자의 의례 수용 정도, 대중의식의 편재 등 제반 조건에 따라 차등을 두고 새로운 양식 안에 점차 통합되었다. 식민지 근대의 유럽 흉내내기가 조장하는 의례의 에티켓 개념화는 침묵의 예(禮)를 폭죽과 같은 확대된 비침묵으로 대체하면서 혼례를 과시의 의례로 변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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