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7세기 후반에 백제에서 도일한 기치다이죠(吉大尙)의 후손 요로시(宜)와 지슈(智首)는 다무라노사토(田村里)에 거주하며 기치타노무라지(吉田連)라는 姓을 받고 일본 고대의 氏姓制 사회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의술과 문예’면의 능력을 기초로 하여 기치타노무라지씨가 율령관인으로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기치타노무라지요로시(吉田連宜) 이후 기치타노무라지에히토(吉田連兄人), 히다마로(斐太麻呂), 고마로(古麻呂) 등이 계속하여 의료관사에 보임되었고, 의료관사에 보임되지 않은 인물은 국사직 등을 수행하며 율령 관인으로 활동하였다. 이것은 기치타노무라지씨가 관료제 사회에 동화되면서도 지속적으로 씨족 내에서 의술은물론이고 율령관인으로 임용되는데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전수하고 심화시켜 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요로시와 지슈 등은 천황의 요시노(吉野) 행차 연회나나가야왕(長屋王), 후지와라후히토(藤原不比等)의 시연에도 참가하여 「도래」계 지식인은 물론이고 후지와라(藤原), 아베(阿倍)씨 등의 귀족 정치가들과도 교유하며기치타노무라지씨의 활동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더구나 다무라노사토에 거주한기치타노무라지씨는 오토모(大伴)씨와 대를 이어 시문을 매개로 교유하였고, 다무라다이(田村第)에 거주한 후지와라노나가마로(藤原仲麻呂)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또 근접 지역에 거주한 와니(和珥, 和邇, 丸邇, 丸)씨계 씨족과도 교류하였고, 8세기 후반에는 직무상으로도 아와타노아손(粟田朝臣), 하쿠리노오미(羽栗臣, 葉栗臣)씨 등 와니씨계 씨족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기치타노무라지씨는 관인사회와 지역사회에서의 활발한 움직임을 기반으로 하여 나라시대를통해 지속적으로 ‘입내자’를 배출하는 씨족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헤이안(平安)시대가 되면 기치타씨는 左京과 右京에 나누어 거주하게된다. 󰡔육국사󰡕에는 좌경인의 활동에 관한 기사는 확인되지 않지만, 우경인의 활동은 확인된다. 홍인 2년에 기치타노스쿠네(吉田宿禰)라는 성으로 개성한 우경인기치타노무라지미야마로(吉田宿禰宮麻呂) 이후 후미누시(書主), 다카요(高世) 등은헤이안 조정에서 입내하며 율령관인으로서의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의료관사와는 무관한 분야에서 관인으로 활동하였다. 이것은 기치타노스쿠네(오키요노아손[興世朝臣]으로 개성)씨가 헤이안시대 전기의 ‘문인적소양’이 중시되는정치, 사회적인 상황에 맞추어 ‘의술과 문예 방면에 모두 능통한 씨족’이라는 특징 가운데 문예면에 비중을 두고 새로운 씨성을 칭하며 당시 사회질서에 적응해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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