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조선후기 평양은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단군조선·기자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전대 왕조의 도읍으로서 역사의 계승 측면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 도시였다. 이중 기자조선(箕子朝鮮)과 관련해서는 당시 조선지식인들은 부족한 텍스트 자료에도 불구하고 기자가 평양에 거주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러한 지적 현상의 이면에는 기자라는 은(殷)나라의 현인이 조선으로 이주함으로써 조선이 중화문명과 연결된다거나 혹은 연결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의식이 자리 집고 있었다. 평양은 이러한 측면에서 조선의 중화 문명 발상 지역으로서 강력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BR 조선 후기 국왕은 중앙의 제관(祭官)을 파견하는 치제를 통해 기자로 상징되는 중화문명을 존중하고 있다는 뜻을 보이고자 하였다. 나아가 숭인전에 대한 치제는 평양에 있던 또 다른 사우들, 명에 대한 의리의 상징 공간인 무열사나 한반도 국가의 시작을 상징하는 숭령전과 연동하여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중앙 조정에서 기자의 위상을 제고하는 조치들이 반복되는 가운데, 평양 사인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지역의 이익을 관철하고자 했다. 대표적으로 서원 건립 및 사액이 그것이었다. 기자 자체를 모시는 서원을 건립하거나, 기자의 후손으로 인정된 인물을 배향하는 서원을 건립하였다. 나아가 평양 외의 지역에서도 기자의 위상을 분점하여 기자 사우 나아가 기자전을 건립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기자의 위상을 활용하여 지역적 이익을 획득하고자 하는 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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