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이 글은 임진왜란 전 조선이 겪었던 최대 규모의 왜군 침입인 을묘왜변을 전후한 제주도의 방어태세와 왜변의 마지막 전투인 제주성전투를 다루었다. 조선건국 후 제주도는 하나의 진관으로 편성되었고, 주요 포구에 설치한 방호소(防護所)를 중심으로 한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제주도는 별도의 보법 규정을 적용받으면서 병력을 최대한 동원했다. 3포왜란을 계기로 조선은 제주도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의 방어태세를 점검하였다. 제주도는 나름대로의 방어강화책을 모색했지만, 섬의 물력이 대규모 적의 침입에 대한 대비 태세를 구축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조정은 육지로부터의 지원을 통해 섬의 방어태세를 강화하고자 했다. 전라도의 상번 기병 중 일부가 ‘호남원병’으로서 풍화시 제주도에 입도해 주둔하였는데, 그 비용 역시 육지에서 부담하였다. 또한 조정은 유사시 대규모 병력 지원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가리포첨사와 진도군수를 제주도의 계원장(繼援將)으로 삼았다. 을묘왜변 발발 초기 전라도 연안을 휩쓸었던 왜군은 영암성전투의 패배로 해상으로 퇴각했다 제주도를 침공했다. 계원체계의 작동은 가리포가 왜군의 공격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다른 지역의 병력으로 구원군을 편성하면서 지체되었다. 그 과정에서도 가리포첨사가 계원장을 맡는다는 개념은 유지되었다. 제주도의 군민(軍民)은 김수문(金秀文) 목사의 통솔 아래 제주읍성에서 농성하면서 구원군을 기다렸다. 이들은 농성 중 틈을 타서 왜군과의 본격적인 교전을 개시했고, 화살의 엄호 속에 효용군(驍勇軍)으로 왜군의 진영을 와해시키면서 격퇴에 성공했다. 이러한 전투 양상은 영암성전투와 동일했다. 미약한 병력을 토대로 한 제주성전투의 승리는 예상치 못한 일로 대규모 침입에 대한 방어책의 근거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을묘왜변 중 계원체계가 적시적으로 작동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왜변 후에도 그것은 제주도의 방어에서 주요 축으로 존속했다. 결과적으로 을묘왜변을 전후로 한 제주도의 방어태세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내용을 감안한다면 을묘왜변에서 김수문의 활동을 계기로 제승방략이 도입되었다는 유성룡(柳成龍)의 설명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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