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영조대까지 창덕궁과 창경궁 내 동궁 권역은 시민당을 중심으로 한 동궐의 동남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한쪽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중심부에 위치한 국왕의 거처와 물리적 거리가 존재했다. 하지만 영조는 자신의 정무 처소를 환경전으로 옮기면서까지 사도세자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자신이 차대를 행하는 장소에 사도세자를 부르거나 반대로 사도세자가 정무를 처리하는 장소에 자신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사도세자와 접촉면을 유지했다. 그러나 영조는 정조를 세손으로 책봉한 직후 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이어함으로써 국왕의 거처와 세자의 거처를 완전히 분리했다. 그리고 경희궁에서 정조의 중요한 의례를 시행하게 하면서도 사도세자와 만남은 회피했다. 영조의 경희궁 이어는 그 자체로 사도세자를 더 이상 세자로 인정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영조는 숙종, 경종으로 이어지는 정통성이 자신에서 정조로 이어지고 있음을 경희궁 공간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어린 시절 친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도했던 정조는 문효세자가 탄생하자 세자와 관련된 궁궐 공간에 변화를 꾀했다. 사도세자의 비극이 영조와 물리적 거리에서 기인했다고 파악했던 것이다. 때문에 궁궐의 주변부에 있던 동궁 권역을 국왕의 편전인 희정당 가까이로 옮겼다. 이 때 새롭게 조성된 중희당은 상당히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조대 이후부터 효명세자 대리청정기까지 중희당 주변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함께 사도세자의 비극적 공간인 시민당 일대의 흔적은 차례로 지워졌다. 정조는 시민당이 불탔을 때 중건하지 않았고, 이후 옛 동궁 권역에 왕실의 뿌리를 상징하는 수강재를 건립했다. 세자의 공간과 국왕의 공간이 긴밀하게 연결되었던 정조대 동궁 권역의 변화는 헌종대 낙선재 옆 석복헌, 그리고 고종대 함녕전 옆 정선당 건립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19세기 국왕들은 세자와 물리적 거리를 줄여나갔던 정조를 계승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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